
1890년대 조선, 왕실의 담장 너머로 전깃불이 들어오고, 전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은 근대화라는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이 혼란의 시기에, 한 서양 여성이 조선 땅에 들어섰다.
그녀의 이름은 손탁.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 ‘손탁호텔’의 주인이었다.
『미스 손탁』은 작가 정명섭이 쓴 청소년 역사소설이지만,
그 깊이와 묵직함은 성인 독자에게도 충분히 울림을 준다.
실존 인물 '손탁 여사'를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국제 정치, 외세 개입, 왕실과 민중의 갈등을
정교한 서사 속에 녹여낸 이 소설은,
한 여인의 조용하지만 선명한 흔적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손탁, 기록되지 못한 영향력
손탁은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아 조선에 들어온다.
경운궁 인근에 ‘손탁호텔’을 세우고, 외교관과 정치인, 지식인들이 모이는
비공식 외교의 장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단순한 호텔 주인이 아니었다.
서양과 조선을 잇는 가교, 근대적 여성상, 조선의 변화를 기록한 관찰자였다.
그녀가 운영하던 호텔은 단순한 숙박 시설이 아니라,
당시 외국 공사관 인사들, 고종 측근들, 개화파 인사들이 모여
정치적 논의를 펼치던 장소였다.
그 안에서 어떤 대화들이 오갔는지 기록은 없지만,
소설은 그 빈틈을 세련된 상상력으로 채운다.
정치와 여성, 그리고 경계의 이야기
이 소설은 단지 한 외국 여인의 일대기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고종과 명성황후, 일본과 러시아, 개화파와 수구파가 얽힌
복잡한 권력의 흐름 속에서, 손탁은 종종 조용한 주시자이자
때로는 조선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또한 이 작품은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깊이 탐구한다.
서양 여성 손탁과 조선 여성들 간의 차이, 그리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생존하고 목소리를 내는지를
은근하지만 강하게 드러낸다.
이 점에서 『미스 손탁』은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니라,
여성 서사이자, 시대를 건너는 이야기다.
작가 정명섭의 정교한 고증
정명섭 작가는 수많은 역사소설을 집필해온 작가다.
이 작품에서도 그는 실제 기록과 상상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든다.
단어 하나, 배경 하나에도 시대의 향기가 살아 있고,
사건들의 연결고리 역시 실제 역사와 잘 맞닿아 있다.
청소년을 위한 책이지만,
그 안에 담긴 주제의식은 절대 가볍지 않다.
‘외국인’, ‘여성’, ‘근대화’, ‘제국주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
이 모든게 단단하게 얽혀 있다.
책장을 덮고 나면, 생각하게 된다.
왜 그녀의 이름은 역사책에 굵게 쓰이지 않았을까?
왜 여성의 기여는 늘 뒷면에 적히는 걸까?
『미스 손탁』은 그 질문에 대한 한 편의 답변이다.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의 미래를 걱정했고,
그러면서도 철저히 경계에 머물렀던 한 외국 여성의 이야기.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많은 걸 보고, 느끼고, 남겼다.
우리는 종종 위대한 사람만 기억한다.
하지만 시대를 지탱한 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이들이었다.
손탁은 그런 존재다.
그녀의 이름은 작고 조용하지만,
『미스 손탁』을 통해 우리는 그 의미를 되새긴다.
"손탁, 당신의 이야기를 이제야 제대로 읽었어요.
조선의 한 페이지에 당신의 이름을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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